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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 '녹터널 애니멀스' 강렬한 이미지와 기이한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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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에이미 애덤스)은 오래 전에 헤어졌던 전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가 보내온 책을 받는다. 에드워드가 직접 쓴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어나가며 주인공 토니(제이크 질렌할)가 겪는 끔찍한 이야기에 빠져들던 수잔은 책의 내용이 자신과 에드워드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겉으론 행복하게 보였던 수잔의 삶 역시 흔들려간다.

톰 포드가 감독한 <녹터널 애니멀스>(1월11일 개봉)는 거대한 몸집을 지닌 여성들이 전라로 춤을 추는 모습을 한 명씩 화면 가득 느린 동작으로 담으며 강렬하게 문을 연다. 이어 영화는 자신이 관장으로 몸담고 있는 미술관 전시회에서 그 모습을 작품으로 대하던 수잔이 이맛살을 찌푸리고서 그 사이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댄서들은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육체와는 거리가 먼 몸을 가졌고 게다가 벌거벗기까지 했지만 동작은 역동적이고 얼굴은 환희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이는 수잔은 검은 옷을 입은 채 몸뿐만 아니라 표정까지 잔뜩 굳어 있다.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의 균열로 시작하는 영화다. 그 균열은 속에 감추어진 것과 겉으로 보이는 것, 눈 돌려진 진실과 타인들의 시선에 담긴 허상, 존재와 당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립항이 있다. 떠나온 곳과 당도한 곳.

그 균열은 처음에 전남편이 보내온 소설을 읽는 행위와 무관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수잔의 삶과 소설의 내용 사이에 고스란히 놓여 있다. (그렇기에 오스틴 라이트가 쓴 이 영화의 원작 제목은 '에드워드와 수잔'이 아니라 '토니와 수잔'이다.) 극이 끝나갈 무렵 책을 다 읽은 수잔이 나신으로 욕조에서 몸을 일으킬 때, 비로소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린다.

톰 포드는 극중 소설과 극중 현실의 관계에 대해 1인2역의 모티브로 관객들에게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준다. 제이크 질렌할이 현실의 에드워드와 허구 속 토니를 함께 연기하도록 함으로써 두 캐릭터를 사실상 같은 인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현재의 에드워드는 텍스트의 바깥에서 토니로 하여금 고통받고 항변하고 마침내 단죄하게 한다.

반면에 수잔 역의 에이미 애덤스는 현실에서의 역할만 연기한다. 일반적으로 독자는 심리가 집중적으로 설명되는 주인공에 이입하면서 읽는다. 수잔 역시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 영화에서 유사한 동작과 상황 묘사를 통해 소설 속 토니와 현실의 수잔을 수시로 연결하는 데서 드러나듯) 토니에 깊게 이입하게 되고 그가 겪는 비극에 분노하게 된다. 그러다 이 소설 속에서 온통 들끓고 있는 감정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문득 눈치채고 놀란다. 그 책의 제목인 ‘야행성 동물(녹터널 애니멀)’은 수잔의 과거 별명이었고, 그 책의 발문에 적힌 헌사는 ‘수잔에게’였다.

결정적 순간에 토니를 격발한 것은 “나약하다”는 비웃음 섞인 말이었다. 현실의 수잔 역시 에드워드를 떠나기 전에 그렇게 말함으로써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혔다. 나중에 그녀는 자신이 그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지만, 영화는 수잔이 직원들에게 지시하거나 건넨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그 진실성에 회의의 그늘을 덧씌운다. ‘가해자’는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척 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낱낱이 기억한다. 소설은 둘 사이에 있었던 실제 과거 일들에 대한 난폭한 알레고리였다. 소설 속에서 형사 안데스는 수사하고 취조하는 동안 토니를 계속 데리고 다닌다. 함께 다닐 뿐만 아니라 굳이 범인들 얼굴을 바라보며 스스로가 겪었던 끔찍한 일을 되풀이해서 아프게 증언하게 한다. 토니와 안데스, 고통받는 에드워드와 결의에 찬 에드워드. 포장지에 손가락을 베이는 바람에 피흘림으로써 독서를 시작했던 독자 수잔은 이제 꼼짝없이 그 증언을 되풀이해 읽어야 한다. 안데스는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기억 못해도 토니는 기억해.”

에드워드가 여전한 통각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단지 수잔이 에드워드를 떠날 때 했던 부부 사이에서의 말이나 임신과 관련된 행동뿐만이 아니었다. 수잔이 에드워드의 작가적 재능을 폄하하며 비수를 꽂았을 때 그녀가 앉았던 붉은 소파는 소설 속에서 시체들이 발견된 장소로 선명하게 활용된다. 제대로 쓸 줄 모른다고 비판받았던 글솜씨는 제대로 쏠 줄 모른다고 조롱받았던 총솜씨로 변용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작가인 에드워드가 보내온 단 한 권의 소설은 독자인 수잔을 사로잡음으로써 그의 글솜씨를 증명한다. (이 영화에서 수잔의 현실보다 토니의 허구가 훨씬 더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그 소설 속에서 총알은 기어이 단 한 발 발사되어 적중한다. 수잔 스스로가 사들이고도 기억하지 못했던 그림에 적힌 글귀는 ‘복수’였다.

에드워드 역시 결코 넉넉하고 따스한 사람은 아니었다. 작가인 그는 자기 식으로 가장 잔혹한 복수를 했다. 토니에 대한 수잔의 이입 과정은 곧 에드워드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기도 하다. 마침내 수잔은 에드워드의 상처와 마음을 이해하고 옛사랑을 되살린 후 설레는 심정으로 그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거기 없었고, 거기 없을 것이다. 결국 '녹터널 애니멀스'가 남기는 것은 아찔한 이미지와 조마조마한 스릴 끝에 매달려 있는 기이한 정적이다.

현재의 에드워드가 영화 속에서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수잔과의 관계 속에서 에드워드는 이미 완료된 존재이고, '녹터널 애니멀스'를 읽는 행위의 파장이 한 방향으로만 작용한다는 것 역시 그가 택한 복수의 또다른 형식이었다. 토니 헤이스팅스는 죽었고, 에드워드의 마음 속에서 그들의 사랑 역시 오래 전에 그랬다. 토니의 성(姓)인 헤이스팅스는 에드워드와 수잔이 함께 자란 마을 이름이었다.

★★★☆

글쓴이 : 이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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