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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아프도록 생생한 마음의 로드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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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지르지 않는다고 고통스럽지 않은 게 아니다. 어떤 비극은 밖으로 연기 한 줄 내지 않은 채로 무겁게 내연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주인공 리는 무슨 일이 생겨도 그저 무덤덤해 보인다. 이 과묵한 사내는, 그러나 속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견딜 수 없는 것을 필사적으로 견뎌내려는 자이다.

아파트 관리인 리(캐시 애플렉)는 형인 조(카일 챈들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향하지만, 도착 직후 형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장례를 치르기 위한 준비를 하던 리는 형이 아들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후견인으로 자신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당황한다. 고향에서 있었던 아픈 과거에 대한 기억이 수시로 떠오르고, 패트릭과도 계속 갈등이 생겨 어려움을 겪던 리에게 어느 날 전처 랜디(미셀 윌리엄스)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 영화의 제목인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그 자체로 실제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풍경을 영화는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케네스 로너건은 심리적 진실의 흐름을 시종 섬세하게 짚는다. 고향에서 기억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리의 마음 속으로 불쑥불쑥 틈입해 묵은 상처를 찔러대는데, 이 영화는 과거회상의 플래시백을 꼭 있을 법한 자리에 딱 그럴 법한 방식으로 끌어들여가며 한 인물의 어두운 내면 깊숙이 회중전등을 비춘다.

과거와 현재를 교직해나가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플롯은 능숙할 뿐만 아니라 진실하다. 자신이 후견인으로 지목되었다는 형의 유언을 변호사로부터 전해 듣자마자 리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거부한다. 그 순간 이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과거의 일이 길게 펼쳐진다. 이때의 플래시백에 담기는 내용은 워낙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그 효과를 고려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듯) 후반부 클라이맥스 지점에 놓일 법하다.

하지만 이 회상장면은 러닝타임이 40% 가량 진행된 전반부에 담겨 있다. 그건 일단 고향에 돌아온 이상 리가 아무리 회피하려고 해도 오래지 않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결정적 기억이기 때문이고, 어린 조카의 후견인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는 순간 자동적으로 돌출될 수밖에 없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 플래시백 장면이 상당히 길게 삽입되어 있는 것은 리의 입장에선 일단 떠올리면 도저히 중도에 중단할 수 없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리라면 그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 케네스 로너건은 화술의 경제성이나 화법의 효과보다 인물의 내적 핍진성을 예민하게 더듬어 따라감으로써 아프도록 생생한 마음의 로드무비 한 편을 만들어냈다. 연령과 비중을 따로 가릴 것 없이 우수한 이 영화 출연진들의 절제와 품위를 함께 갖춘 연기들도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오래 전 즐거웠던 여름날의 추억을 그려내며 시작했다. 하지만 영화 속 현재는 내내 매섭도록 추운 겨울이다. 극의 어딘가에서 딱 한 장면에만 등장하는 어떤 노인은 아무런 조짐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불쑥 꺼낸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불쑥 들이닥치는 일들이 삶에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의미나 이유조차 모른 채 그 모든 걸 그저 견뎌내야 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이야기는 영영 회복될 수 없는 실락원에 관한 이야기일까. 영화가 끝나갈 무렵 패트릭이 나뭇가지로 찔러보는 땅은 이제 조금 풀려있다. 어쩌면 여름은 끝내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느새 겨울이 가고 있다. 

★★★★

글쓴이 : 이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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