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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 '덩케르크' 야심찬 뺄셈으로 조각한 특별한 전쟁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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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덩케르크'의 소재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전쟁영화에서 관객들이 흔히 기대하는 것들의 정반대 방향에 놓여 있으니까. 이 이야기는 적진으로 용감무쌍하게 달려드는 진격이 아니라 전선에서 허겁지겁 도망쳐오는 철수를 다룬다. 어떤 가치를 내걸고서 죽이는 과정을 볼거리로 전시하는 대개의 전쟁영화와 달리, 이건 오로지 살리는데 주력하는 이상한 전쟁영화다. 게다가 역사적 사실을 담은 내용이라서 사건의 전말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엔 (일부 공중전을 제외하면) 액션 혹은 폭력의 쾌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오직 리액션일 것이다. 극중 병사들은 적기가 날아오고 폭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쏟아질 때마다 그저 계속 피한다. 말하자면 이건 장르적으로 볼 때 전쟁영화보다는 재난영화에 가깝다. 재난영화는 리액션이 유일한 문법이고, 생존이 지고의 선(善)인 장르니까. '덩케르크'에선 적인 독일군이 사실상 비인격적이고 우연적이며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붓는 것처럼 묘사되는데, 그건 바로 자연재해가 인간을 덮치는 방식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덩케르크'를 일종의 재난영화처럼 그려낸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무엇보다 함께 살아남으려는 공동체의 숭고한 지향력을 담아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야심찬 뺄셈의 미학으로 특별한 전쟁영화를 조각했다. 탁월한 영화는 그 속에 들어 있는 것들 뿐만 아니라 들어가 있지 않도록 제외한 것들 역시 훌륭하다. 대사를 대폭 줄이고서 스토리를 시각화하는 이 영화엔 아주 짧은 쇼트 하나를 제외하면 독일군이 묘사되지 않는다. 연합군 안에서도 악당은 없다. 다만 조금 더 흔들렸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극중 인물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두고 온 병든 노모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거나, 주머니에 넣어둔 애인의 사진을 꺼내보며 한숨 짓는 병사도 없다. (도슨의 가족사가 예외적으로 아주 조금 서술되지만, 그는 이 전쟁영화에서 군인이 아니다.)


병사들은 돌아가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남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계속 살아남으려는 것일 뿐이다. 생존 앞에서 평등한 그들 모두는 결국 서로를 발견한다. 인물들이 사선을 넘나들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이 영화가 시종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서로의 운명에 목격자이면서 증언자로 엮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행동의 결과로만 보면 극중 가장 큰 역할을 해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전투기 파일럿인 파리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파리어가 아니라 초기에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구조 작업에 제대로 힘을 보태지도 못한 소년 조지를 영웅으로 기념한다. (본성이 아니라 인물이 놓인 종반부 위치의 측면에서, 파리어와 조지는 각각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과 하비 덴트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건 곧 작전에 함께 한 모든 사람, 즉 공동체 전체가 영웅이라는 선언인 셈이다.


그렇게 놀런은 역사적 맥락이나 적의 동향을 괄호 치고, 각 캐릭터의 사연과 배경을 생략하고서 개인적 편차를 최대한 줄임으로써, 한 두 명의 인물들이 극적으로 돌출되는 전형적 영웅서사를 경계한 채, 부분의 합보다 전체가 훨씬 더 큰 벽화를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균질하고도 단일한 현실의 시공간을 자신만의 복잡한 영화적 시공간으로 재편하는 데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온 크리스토퍼 놀런은 '덩케르크'에서도 플롯의 마술을 부린다. 이 영화에서는 잔교에서의 1주일과 바다에서의 1일 그리고 하늘에서의 1시간이 서로 다른 서술자에 의해서 서로 다른 시간의 농도로 중반부까지 현란하게 교차 서술된다. (이와 관련해 도슨이 모는 배 이름이 '문스톤'인 것이 눈길을 끈다. '문스톤'은 영문학사 최초의 추리소설로 다양한 서술자를 등장시켰던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작품명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작동방식을 지닌 세 개의 시공간이 서로 다른 시점 제공자에 의해 펼쳐지는 이 영화의 복잡한 구조는 '인셉션'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셉션'의 다리와 호텔과 설원에서 펼쳐지는 서로 다른 세 사람이 꾸는 세 개의 꿈 장면들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흘렀던 시간을 떠올려보라.)


이 심플한 영화에 놀런은 왜 굳이 그렇게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 넣었을까.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서로 다른 작동원리가 지배하는 세 개의 시공간으로 나눠버리면 각각의 세계에서 인물들의 고립감과 절박함은 극대화된다. 또한 그 세가지 세계는 서로 다른 압축 정도를 보이는 영화적 시간에 종속되기 때문에 심리적 서스펜스를 다양하고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시간 밖에 없는 하늘의 파일럿에겐 시간이 너무 급박하게 흘러서 문제이고, 1주일이나 기다려야 하는 잔교의 패잔병에겐 시간이 너무 늦게 흘러서 문제이다. 전자의 급박함은 점점 줄어드는 연료를 통해 표현되고, 후자의 절망감은 승하선의 무망한 반복을 통해 묘사된다.


아울러 물리적으로 균질한 현실의 시공간을 서로 다른 세 개의 시공간으로 구획 짓는 인위적 설정은 결국 셋이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기 시작하는 지점을 강력한 영화적 무게중심으로 만들어낸다. '덩케르크'에서 그 지점은 공중전을 벌이던 콜린스의 전투기가 피격되어 바다로 추락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하늘의 파리어와 바다에 있는 도슨의 시점 쇼트로 연이어 두 차례 묘사되는데, 이 대목에 이르러 중층적 구조는 해소되어 단일한 시공간 속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콜린스가 바다에 빠지는 장면이 영화적 무게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명백해 보인다. 그건 구조를 하는 사람이 구조의 대상자가 되는 순간이다. 이건 단지 능력과 용기와 선의를 겸비한 구조자들이 무능하고 비겁하며 살아야겠다는 본능만 남은 구조 대상자들을 돕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한가운데서 그 둘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니 구조 작업을 하는 것은 구조자가 아니라 구조 대상자와 구조자가 사실상 동전의 양면이면서 하나의 전체인 공동체 자체인 것이다.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항상 우연을 통해 그어졌다. 덩케르크의 골목에서 홀로 살아남은 토미가 해변과 잔교와 어뢰공격에서 연거푸 죽지 않게 되는 것은 그의 능력이나 품성과 무관하다. 그때마다 그는 그저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그 자리에 납죽 엎드리거나 필사적으로 달아났을 뿐이고, 퍼부어진 폭탄과 총알이 우연히도 다른 병사들은 건드리면서도 그는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떨어지는 폭탄들이 하나의 쇼트 안에서 객석과 수직방향으로 퍼부어지게 한 묘사는 절묘하다. 후경으로부터 일렬로 떨어지면서 점점 전경으로 떨어지던 폭탄들이 최전경에 엎드려 있는 토미 바로 직전에서 멈출 때 관객이 안도하게 되는 것은 주인공의 안위를 확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일 토미까지 폭사했다면 그 다음 폭탄은 객석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마치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지독할 정도로 체험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처럼 뛰어난 화법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하지만 '덩케르크'의 후반부에 이르면 폭압적인 우연이 날뛰는 재난영화의 플롯이 공멸의 재앙을 거스르는 위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공동체 드라마 플롯으로 전환된다. 원칙 따윈 없다고 공언하는 우연이라는 악마의 난동 앞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다가도, 끝내 함께 어깨를 겯는 선의를 동력으로 삼아 공동체가 재건되는 모습을 극적으로 그려내는 주제는 사실상 '다크 나이트'와 동일하다.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딜레마를 선명하게 다룬 '다크 나이트'의 배 두 척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 사건은 '덩케르크'에서 토미와 깁슨 그리고 알렉스의 관계를 통해 흥미롭게 변주된다. 배 한 척에는 일반 시민들이 타고 있고 다른 한 척에는 죄수들이 타고 있는 것으로 설정했던 '다크 나이트'에서처럼, '덩케르크'에서도 토미와 깁슨은 각각 영국군과 프랑스군이어서 놓여 있는 위치가 다르다. 영국군 위주로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영국으로 퇴각하는 영국 선박에 오르려는 프랑스 군인은 언뜻 무임 승차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토미와 깁슨의 행동은 서로 대칭적이다. 토미 역시 도입부에서 엄호 사격을 해주었던 프랑스 병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첫장면 주택가 골목에서 목이 말라 둘둘 말린 고무 호스에 남은 물 몇방울까지 애타게 핥았던 토미에게 깁슨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물통을 건네는데, 중반부가 되면 그와 정반대로 자신이 습득한 국물 흥건한 통조림통을 토미가 깁슨에게 준다. 깁슨은 익사 위기의 토미 일행을 구해주고, 토미 역시 나중에 수중 탈출의 순간에 깁슨을 챙긴다. 그 둘은 이미 정원이 차 버린 배에 올라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부상병을 들것에 싣고 승선하는 것임을 직감하고서, 2인1조가 되어 일찌감치 본능적으로 협력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찾아오자 "생존은 불평등한 거야"라면서 깁슨을 적대시한다. 한 명이 배에서 나가야 그 반대급부로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인간관계나 윤리를 '제로섬(zero-sum)'으로 보는 사람이다. 반면에 한 명이 나가봤자 차이가 없고 다 같이 살 수 있다고 믿는 토미는 '넌제로섬(nonzero-sum)'으로 본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이 그렇게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넌제로섬의 관계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다. 배 한 척에는 적정 승선인원이란 게 있지만, 민간인들이 모는 소형 선박들을 포함한 배들은 위험을 무릅쓰고("맙소사, 대체 몇명이나 태운 거에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작전을 완수한 사람들은 "너 대신 내가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살아야 한다"고 외치던 사람들이었다. '덩케르크'는 생존의 드라마가 아니라 공존의 드라마다. 크리스토퍼 놀런이 꿈꾸는 이상적 공동체는 그렇게 작동한다. (이 영화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주위에서 도와주는 익명의 존재가 등장한다.)


그러니 종반부에 영국으로 돌아와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알렉스일 수밖에 없다. 제로섬의 윤리관을 가진 그로서는 자기가 살아 돌아오는 대신에 전장에서 죽은 누군가를 상기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부끄러워 하는 그에게 부둣가 맹인은 흔쾌히 이렇게 말한다.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충분해." 우발적인 몸싸움으로 쓰러져 죽게 되었던 소년 조지가 그 직전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호소했음을 상기할 때, 그 맹인은 자연스럽게 조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사실상 그 순간, 작전 도중 죽은 조지가 작전의 결과 살아 돌아와 죄책감을 느끼는 알렉스의 마음을 풀어줌으로써 그 모두가 하나를 이루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마지막 장면에서 처칠의 연설이 담긴 신문을 대독하며 대미를 장식하는 사람이 토미여야 하는 걸까. 일단 먼저 그의 이름이 토미라고 확언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분명 토미라는 이름이 (아마도 편의상) 명기되지만, 극중에서 그 이름은 불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알렉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깁슨은 남의 이름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중 구조하는 사람들은 극중에서 이름이 불리는 반면, 구조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없다. 관객들이 얼굴을 확연히 알아보기 힘든 무명배우에게 토미(라고 명기된 병사) 역할을 맡긴 것 역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의 생존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지켰지만, 토미(로 불리는 그)는 그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에 정신이 없었던 흔하디 흔한 병사였다. 이것은 영웅서사가 아니다. 결국 대독할 수 있는 그의 자격은 평범성과 익명성에서 온다. 악에 맞서서 결연한 의지를 실어 나르는 그의 목소리는 평범한 익명의 목소리이자, 영국의 목소리이며, 곧 인류의 목소리이다.

★★★★☆

글쓴이 : 이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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