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뷰 본문

다음영화

[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 12월 한국영화 대작 세 편의 공과

- '1987' '신과 함께' '강철비'

114,422 읽음
댓글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올 겨울 큰 기대를 모아왔던 한국영화 대작 세 편이 연이어 개봉했습니다. 이 세 편에 대한 평을 함께 올립니다. 

1987

출처이미지=영화<1987>

모르고 보았다면 '지구를 지켜라'와 '화이'의 장준환 감독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상상력과 파국을 마주하고도 가속기에서 발을 떼지 않는 배짱 대신, 역사 앞에서 사려 깊게 옷깃을 여민 채 거대한 벽화를 정교하고도 힘차게 그려나가는 필치가 있다.

 

'1987'은 사건 한가운데서 작고 선명하게 시작해 결국 거스를 수 없는 저류를 만들어내며 도도히 흘러가는 역사 자체를 그려낸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급박하게 뒤얽히며 펼쳐지는 거대한 이야기가 길을 잃지 않은 데에는 보기 드물 정도로 화려한 출연진이 도움을 주었다. 등장만으로도 캐릭터를 구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스타 캐스팅은 제한된 러닝타임 내에서 인물들을 일일이 성격화하는데 시간을 쓰는 대신 격랑의 힘과 방향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출처이미지=영화<1987>

이 영화의 배우들은 충실한 연기로 내내 공감을 일으키지만, 하정우와 강동원 활용법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아쉬움이 남는다. 흘린 양주를 입으로 핥으면서 등장하는 하정우와 마스크를 내려 얼굴을 들이밀면서 등장하는 강동원은 극중 여타 배우들과 다른 질감으로 스타성이 활용되었다. 이 절박한 이야기에서 숨쉴 틈을 만들려는 대중적 고려가 있었겠지만, 그 때문에 영화 자체의 동력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연희(김태리)의 친구처럼 부주의한 관성으로 직조된 캐릭터도 없지 않다.

'1987'은 전반부에서 이해하게 하고, 후반부에서 참여하게 한다. 이 작품의 주요 배역들 중 유일하게 허구의 인물인 연희가 등장하는 순간 그 전환이 시작된다. 주저하거나 회의하면서도 사건 깊숙이 발을 디디며 변화하는 연희의 심정은 곧 시대의 마음이고, 눈물을 쏟으면서도 있어야 할 자리에 우뚝 서는 연희의 표정은 시대의 물줄기를 돌린 수많은 익명들의 얼굴이다. 그리고 영화는 온전하게 길을 가던 사람이 남긴 신발 한 짝을 또렷이 기억한다.


거기엔 부당한 권력에 적극적으로 항거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최검사("원하는 거? 난 그런 거 모르겠고, 나는 내 일만 합니다")와 한교도관("매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야") 같은 인물들은 원칙과 상식으로 자기 일과 관련된 신념을 지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드러낸다. 만일 그때 그 검사가 화장동의서에 날인을 했더라면, 만일 그때 그 의사가 사인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면, 만일 그때 그 기자가 펜을 꺾었더라면, 만일 그때 그 교도관이 눈을 감았더라면, 만일 그때 그 학생이 용감히 나서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의 악은 특히 박처장(김윤석) 한 사람에 집약되어 묘사되지만, 선은 그렇지 않다. 희망은 작은 고리의 연쇄에서 나온다. 역사의 물줄기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정확히 한 세대를 사이에 두고 1987년과 2017년의 광장은 뜨겁게 공명한다.

★★★☆


신과 함께-죄와 벌

출처이미지=영화<신과 함께>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죄와 벌'에는 볼거리와 눈물이라는 두 가지 무기가 있다. 극중 등장하는 다양한 지옥의 풍경들은 매우 흥미롭다. 불 물 돌 얼음 거울 등의 재료를 구사해 진기하게 빚어냈다. 모래로 형상화된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을 그려낸 방식이 시선을 사로잡고, 원귀가 된 인물을 표현한 특수분장도 좋다.


하지만 시각효과에서조차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력이 아니라 상상력일 것이다. 이 영화의 볼거리들은 관객을 끌어들이지 못한 채 마냥 구경하게만 한다. 7개 지옥의 모습이 대부분 까마득히 먼 익스트림 롱쇼트에 담겨 전체적 설정과 맥락만을 제시하는데 그친다. 이미 '천국보다 아름다운' 같은 작품이 나온 게 지금보다 CG기술이 한참 부족했던 20여년 전이 아닌가.

출처이미지=영화<신과 함께>

이 영화는 (가족 드라마가 어쨌든 힘을 발휘하는 후반에 이르기 전까지 특히) 방향이나 분위기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허둥댄다. 현실 세계와 사후 세계는 반복되는 디졸브(두 장면이 부분적으로 겹치도록 연결하는 장면전환법)와 플래시백에도 불구하고 따로 노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중이 큰 법정장면들은 법리나 논거로 치열하게 맞붙는 대목 하나 없이 조악하게 나열되어 시간을 낭비한다.


감독이 선택했을 배우들의 연기 톤 역시 이물감이 가득해서, 영화 혼자 계속 낄낄대는 것처럼 여겨진다. 특히 심각한 것은 대사인데, "니네 땜에 늙는다 늙어"라는 아역 배우의 말처럼 거의 통하지 않는 유머가 줄을 잇는가 하면, "이제 다시는 지나간 슬픔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처럼 거북한 문어체 대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김동욱은 눈길을 끌며 활약했고, 하정우는 영화에 최소한의 안정감을 부여했으며, 이정재는 카메오로서 제몫을 해냈다. 그러나 이렇게 디테일이 좋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영화에서 배우들이 빛을 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출처이미지=영화<신과 함께>

그리고 눈물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확실히 울린다. 하지만 그것은 만든 이들의 능숙한 드라마 작법이나 연출력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보면 거의 본능적으로 이입하고 마는 우리 뇌의 공감능력 때문이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은 김치를 손으로 찢어주는 어머니 손길로 담아내고,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사람은 거리에서 술병째 병나발을 불며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찍어낸다.


자신의 책임이 아닌 억울한 상황 때문에 고통받는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삼거나, 선한 자의 악행을 하나씩 다뤄나가도록 스토리라인을 신선하게 설정하고도, 이 영화의 공업적인 최루법은 결국 어머니의 그 크신 사랑만을 돌림노래로 부른다. 더구나 그 모성으로부터 목소리조차 빼앗아 내내 당하기만 하는 존재로 박제화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


강철비

출처이미지=영화<강철비>

한국의 파란만장한 역사나 위태로운 지정학적 상황과 관련된 강력한 소재를 선택하고도, 소극적인 태도로 뻔한 가족드라마 주변만 맴돌다가 자진하는 영화가 얼마나 많았던가.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는 소재에 대한 두려움 없이 큰 이야기를 정면에서 크게 다룰 줄 아는 드문 한국영화다. 게다가 보는 시각에 따라선 위험할 정도로 끝까지 달려가 강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뚝심과 사건의 구체적인 진행양상을 설득시키는 세공력을 함께 갖췄다. 

출처이미지=영화<강철비>

여기에는 흥미로운 설정들이 있다. 대통령 선거당일에 시작하는 이 영화는 권력교체기를 배경으로 삼는다. 정치적 입장이나 철학이 상반된 전임 대통령과 후임 대통령의 대립은 북핵 문제에 임하는 한국 정치인들의 두 시각을 대변한다. 극중에서 한국을 둘러싼 강대국들이 제각각 현실적 계산으로 확전을 막으려 하는데 비해, 가장 극단적인 대응법이 한국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것으로 그려지는 상황은 '강철비'가 손쉽게 호소할 수 있는 민족주의에 기대는 영화가 아님을 증명한다. 두 번이나 인용되는 "분단 국가는 분단 자체가 아니라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 때문에 더 고통받는다"라는 대사는 이 영화가 겨누는 비판의 칼날이 어디로 향하는지 명확히 드러낸다.


'북한 1호'로 지칭되는 북의 최고 권력자가 의식불명 상태인 채 남쪽에서 치료받는 상황인 것도 눈길을 끄는 설정이다. 실제 북핵문제에서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예측하기 어려운 성격이 가장 위험한 요소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는 김정은을 유고상황으로 괄호친 후 북한에서 일어난 쿠데타와 관련해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이 사안을 좀더 원론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출처이미지=영화<강철비>

곽도원은 한국영화에서 한번도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이 없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역을 맡아 지성과 의지를 함께 갖춘 캐릭터의 힘과 인간미를 제대로 살려냈다.


이 영화 속 정우성에게선 캐릭터로부터 유리된 스타의 면모가 발견되지 않는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나 '무사' 같은 출연작이 증명하듯 탁월한 액션배우이기도 한 정우성은 암환자인 정예요원으로서 육체의 강함과 약함을 함께 표현하는 격투 장면들도 멋지게 소화했다. 극중 상황 설정 때문에 마주 보지 못하고 차량이나 식당 의자에 나란히 앉아 연기하는 장면이 많음에도 두 인물 사이의 감정적 교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 역시 두 배우의 몫이 크다.


'강철비'는 대작 오락영화로서의 스킨십이 조금 부족해 보인다. 남북의 현격한 경제적 격차와 관련해 북한사람을 음식으로 그려내는 방식은 게으르게 느껴진다. 곽철우(곽도원)의 가족과 관련한 묘사는 불필요해 보이고, 엄철우(정우성)의 가족과 관련한 묘사는 다소 관습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손쉽게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우연을 계속 끌어들이는 것도 아쉽다. (짧은 시간에 인천공항에서 중국 미국 일본의 핵심 인사들을 연이어 만나게 될 때 곽철우가 "와, 나 인기 짱이네"라고 농담하지만, 사실 이런 대사는 편의적인 우연 남발을 코믹한 대사로 가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강철비'가 거둔 성과는 만만치 않다. 감정에 호소하기에만 급급한 한국영화가 수없이 많은 상황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맥락과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구사하는 지성이 실로 귀하다. 장르의 토착화라는 측면에서도 단단한 성취를 보였다. 북핵위기가 아찔하게 치달았던 2017년이니, 이 영화는 환기와 제언의 역할까지 담당하게 될 것이다.


★★★☆


글쓴이 : 이동진 영화평론가


해시태그

작성자 정보

다음영화

    실시간 인기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잠시 후 다시 시도해 주세요 Please try again in a moment